유기적 레이어 (갤러리 도스 2015 전시 평문)
이선영(미술평론가)
‘유기적 레이어’라는 전시부제로 열린 윤정희의 개인전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동선으로 성글게 짠 둥그스름한 구조물들이 편재한다. 전시장 바닥에 벽에 그리고 귀퉁이에 듬성듬성 놓인 것들에는 새봄을 맞아 생명이 부글거리며 발생하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빵이 효모균에 의해 부풀어 오르듯이, 팽팽하게 부풀다 못해 그 위에 또 다른 촉수를 뻗는 움직임에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인디안 핑크의 온기를 품은 색선들은 한 아름, 또는 한바구니 정도 부피로 한정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와 움직임이 내재해 있다. 페이지를 넘기며 볼 수 있는 전시도록에는 덩어리들이 하나 둘 증가하는 방향을 지시한다. 공간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윤정희의 작품에는 시간성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뿐 아니라, 동질이상을 이루는 일련의 것들은 증식하는 것 같은 환영을 만든다. 하나의 세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포함한 얼마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번성했는가를 생각하면, 세포들의 증식 이미지에는 시원의 풍경을 목도하는 것 같은 감흥이 있다.
세포 같은 모습을 한 덩어리들은 생명의 축소판으로, 생명의 먼 기원을 알려주는 원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거대 유기체보다 환경변화에 더욱 유연하게 반응한다. 윤정희의 작품 속에 있는 무성생식의 이미지는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생명의 한 양상이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무성생물을 완벽한 불멸의 생명체로 본다. 이들에게 생식은 세포 분열만으로 이루어지고 분열을 통해 생겨난 두 개체는 완전히 똑같으므로 하나의 개체가 성장과 번식을 거듭하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생존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론은 인공생명에도 해당된다. 물론 그것은 발전된 생명공학을 통해서 체액 한 방울로 정체성과 운명이 결정되는 음울한 SF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장황한 기계장치 등이 동원되곤 하는 현실적 움직임보다는 잠재적 움직임이 더욱 효과적이고 풍요롭다. 미술의 가장 큰 장점인 가시성이 어떤 한계로 작용할 수 있듯이, 미술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동성은 그 반대로 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동성은 전후좌우의 함축성을 직관, 또는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들은 숨 쉬고 꿈틀대는 느낌이지만, 덩어리들이 놓인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전시장 바닥에는 30개의 덩어리가 5x6열로 배치되어 있다. 하얀 바닥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하얀 좌대들은 핑크색 덩어리를 어디선가 떼어온 샘플같은, 가령 분석을 위해 유리판에 한 방울 떨어뜨린 점액질 같은 모습이다. 유기체 특유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 대신에, 기계적인 나열이 두드러진다. 그것들은 각자 자족적인 단자(monad)들이다. 윤정희의 작품은 여성의 섬세한 솜씨로 재현된 유기체적 자연을 넘어서, 유기체가 처해있는 새로운 상황을 포함한다. 이 새로운 유기체는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있으며, 전체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중심/주변의 관계에 바탕 하는 유기적 전체는 억압적일 수 있다. 억압을 낳는 위계적 관계를 해체하고 ‘자연은 재발명’(다나 해러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재발명을 위해서 다나 해러웨이처럼 사이보그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비전이 경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은 중요하다. 경계의 침범이나 와해라는 사이보그 담론의 주제가 자연이라는 ‘생명의 그물’(프리초프 카프라)처럼, 수직적 계층에서 수평적 연결망으로의 전환이라는 패러다임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윤정희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수평적 배열은 세대에서 세대에 걸쳐 유전자를 교환하는 수직적 방식이 아니라 같은 세대 내에서 옆에 있는 것들과 직접 유전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번식하는 무성생식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같은 규칙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유기적 총체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해체한다. 어디에도 강조점이 찍혀있지 않은 무관계성, 즉 미니멀리즘적 나열방식이 보여주는 것 또한 그것이다. (가상적)움직임은 한 방향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 방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중심도 텅 비어 있다. 또는 각 층들의 궤도의 중심은 각기 다르다. 거기에는 핵심과 주변의 관계가 아니라, 점차 커지는 층들의 계열만이 있다. 여러 겹의 층을 이루는 표면들은 선으로 엮여있는 망들이다. 선으로 엮인 망들의 구조에는 안으로 접혀지거나 밖으로 펼쳐지는 쌍방향의 움직임이 있다. 최소의 부피에 최대의 표면을 함축하는 구조이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기로 어떤 훌륭한 건축가는 일교차가 큰 아프리카 기후를 이용하여 복잡한 망에 물이 맺히는 구조물을 발명하기도 했다. 망은 최대한 펼쳐진 표면을 의미하며, 생명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망으로 이루어진 껍질들은 가운데를 반투명하게 보여줄 뿐이며 층이 더해질수록 불투명성을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은 극도의 투명성을 견지해왔던 과학조차도 불투명해지면서 예술을 닮아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인식론상의 무정부주의라기보다는 새로운 실재에 대응하는 겸허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수제비 떼어내듯 덩어리진 것들은 동일한 규칙 속에서도 다양한 형상을 만들어내며, 안팎의 공간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덩어리들은 그 무엇으로도 자라날 수 있는 만능세포같은 잠재력을 가진다. 비어있음이 가변성을 극대화한다. 비어있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빈 중심으로부터, 또는 여러 개의 중심으로부터 다양한 유희가 가능하다. 질서 정연하게 바닥에 놓인 것들은 엔트로피의 측면에서 보자면 최대한의 잠재력을 가진다. 생명은 엔트로피의 증대에 대항하며 자기 보존과 조절을 위한 구조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미세한 변화를 축적시켜 진화한다. 그것들은 어떤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한다. 다양한 곡면을 형성하면서 복잡다단하게 출렁이는 망들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덩어리들은 2012년의 전시 ‘씨앗으로부터’처럼 씨앗과 같은 속성을 가진다. 그 밖에 ‘되어가다’(2011), ‘불완전함의 연속’(2009) 같은 근 몇 년 동안의 전시부제에는 작가가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에, 완결보다는 과정에, 존재보다는 되기에 방점을 찍어왔음을 알려준다. 이번 ‘유기적 레이어’ 전에서도, 공기만을 품고 있는 듯한 망구조물은 본질보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은 결핍이기 보다는 미지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바닥에 놓인 것들이 중력에 몸을 싣고 옆으로, 위로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선반위에 죽 올려놓은 것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좀 더 역동적인 방향성을 가진다. 그 역시 바닥에 설치한 작품들처럼 시간을 공간화, 또는 공간을 시간화 한다. 그것들은 시공간의 축을 따라 확장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여 적응, 또는 변화하는 생명체처럼,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덩어리들은 보이지 않는 주변까지 포함한다. 덩어리들은 잔잔한 진동으로부터 울뚝불뚝한 움직임까지 다양한 진폭을 가진다. 그것은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에서 진행 중인 생명의 움직임처럼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은 물질 뿐 아니라 정신 속에서도 발생한다. 상상력 또한 발아하고 자라고 번성하며 때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맞은편에는 선적으로 증식하는 작업 스타일이 드로잉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는 형태와 더불어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이 도해된다. 형태변화를 야기하는 새로운 결합규칙들은 의미가 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몇 안 되는 요소의 조합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언어적이다. 단순함이 단지 단순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 다양성과 외연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선반과 바닥에 놓인 덩어리들은 3차원 상에 구현된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3차원 상에서 여러 번 중첩된 곳은 진하게 보인다. 형상은 매번 중층 결정(overdetermination) 된다. 처음과 끝은 불확실하지만 자체의 동력에 의해 하염없이 나아가는 선들은 그 자체가 생성의 이미지이다. 윤정희의 작업에서 생성의 이미지는 구조와 밀접하다. 일련의 패턴이 감지되는 덩어리들은 움직이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손을 뜨개바늘로 삼아 엮은 망들은 반복 속에서 결합의 규칙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여기에서 여성의 몸이라는 매개는 기계적인 것을 포함한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자연은 기계적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이 수많은 실험을 진행해왔듯이, ‘욕망하는 기계’(들뢰즈)의 단면들은 횡단적 접속을 극대화한다. 금속으로 짜여 진 망이라는 작품의 본질적인 형태는 예술 또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안팎의 구별이 모호하고 뼈이면서도 살처럼 보이는 덩어리들은 경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덩어리들은 위아래를 바꾸거나 안팎을 까도 항상성을 유지할 만큼 유연하다.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과학기술, 생물학, 컴퓨터 기술, 정보통신, 매체의 세계는 매일 우리의 정신적 좌표들을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말했듯이, 오늘날 경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가장 큰 동인은 과학기술이다.
인간이나 주체성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떻게 주체성을 생산하고 포획하고 풍부화 하고, 이제 돌연변이적인 가치 세계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발명해 가는가’(가타리)가 중요하다. 촉촉하면서도 따스해 보이는 덩어리들은 두개골과 가슴 속에 자리한 기관 뿐 아니라, 세포에서 어머니-지구까지 생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은유로 확장된다. 윤정희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오랜 노동이자 예술이기도 했던 뜨개질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생명 및 인공생명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의 비유 또한 강력하다. 기술은 과거의 딱딱한 외관을 버리고 생명과 보다 ‘자연스럽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윤정희의 작품을 여성, 자연, 전통, 공예 등으로 묶어 놓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 반대로, 그녀의 작품은 첨단적인 것일수록 근본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견고하면서도 유연한 생명의 그물망 (씨앗으로부터, 송은아트큐브 2012 전시 서문)
이선영 (미술평론가)
윤정희의 작품은 차가운 금속 선으로 짜여 진 구조물이지만 부글거리는 듯한 뜨뜻한 생명의 기운이 있다. 그것들은 건강한 생명이나 이상적인 예술처럼 견고하면서도 유연하다. 그것들은 현미경 아래의 미생물체 또는 눈도 색도 없는 심해의 생물체처럼 보이기도 하며, 효모에 의해 잘 부풀려진 빵이나 잘 말려있는 솜사탕처럼 탐스럽기도 하고, 꼬마의 상상 속 유령이나 할머니가 처마 밑에 걸어둔 저장 야채 같기도 하다. 미세한 주름들로 가득한 그것들은 생명이 펼쳐지는 생성의 이미지와 다시 접혀지는 소멸의 이미지가 동시에 있다. 생성이든 소멸이든 변화 중인 중간 단계 같은 모습이다. 생성이나 소멸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가 아니라, 변형이나 변태의 과정 중에 있다. 그 점에서 윤정희의 작품은 유기체적이다. ‘씨앗으로부터’라는 전시부제는 생명을 출발시키는 원초적 기질과 에너지를 응집시키려는 의도를 예시한다. 안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안팎이 구별되지 않은 단일 표면들의 변주는 유기체 특유의 주름들로 가득하다.
유기체의 주름이 새겨진 씨앗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말하듯이, 러시아 인형처럼 무한히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감싸여 있다. 최초의 개체는 때가 되면 자신의 차례에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된다.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가 죽었을 때 이 유기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아 넣어지고 되 접히게 된다. 씨앗으로서의 작품은 유전자에 의해 입력된 정보에 따라 순차적으로 펼쳐질 여러 층위들을 공시적으로 보여준다. 공중에 매달려 있고 선반 위에 놓여 있고, 벽에 핀으로 고정되기도 하는 등, 작품마다 배열 방식은 다르지만 코바늘 뜨기처럼 짜여 지는 구조라서 대칭형을 기본으로 변주 되는 식물 형태가 감지된다. 층층이 겹쳐지는 구조가 형태와 부피를 만든다. 학창 시절 청계천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얇은 동선은 전기를 통하게 하는 부품으로, 빳빳해서 형태가 잡히면서도 부드럽게 엮일 수 있다. 이 재료를 작가는 2009년 첫 개인전 때부터 계속 사용해왔다.
섬유가 얽히는 방식이 비슷하여 코바늘 뜨기 같은 느낌이지만, 바늘 없이 손으로만 한다는 차이가 있다. 결합체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은 기하학과 생물학을 교차시킨다. 첫 개인전에는 수편기를 사용하여 평면으로 판을 짜고 이를 다시 입체로 설치하였는데, 이후부터는 안쪽으로 동글동글하게 말리는 식으로 짜나갔다. 수직 수평의 좌표계를 벗어난 그것은 만물이 비롯될 내재성의 판이 된다. 인체의 형상이 있는 이전 작품에 비해 이번 전시작품은 보다 추상적이다. 씨앗이라는 은유를 통해 보다 원초적인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뭉글뭉글 덩어리진 형태는 어떤 감정 상태와 관련은 되지만 특정한 감정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형태 또한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어디쯤에서 끝난다는 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원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예정된 궤도를 빗나가는 여정은 생물의 발생으로 친다면 돌연변이나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이 역시 유전자가 재조합 되어 생겨난 새로운 유전적 구조처럼 형성될 뿐이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병리이든, 생명의 과정이라는 기본 메커니즘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손으로 금속선을 짜는 과정은 씨앗이 발아하여 성체가 되는 것처럼 점점 커지는 단계를 공유한다. 동질의 표면이 중첩되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배의 발생과 유사하다. ‘한 올 한 올 고리를 엮어가며 형태를 생성해 나간다’는 방식을 통해, 존재보다는 되기에 방점을 찍는 방식은 여전하다. 인체가 등장하는 2009년 개인전 작품에는 머리를 몸 깊숙이 박고 움츠려 있거나 누더기처럼 기워진 인체 껍데기 형태를 통해 보다 직설적인 감정 상태를 전달했다면, 이번 전시작품들은 이전보다 모호한 형태지만 거기에 내재된 감성은 더 포괄적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주머니가 안쪽으로 겹쳐져 있는 이전 작품 [되어가다](2009)나 인체 형상 안에 또 다른 주머니들이 마치 내장처럼 보이는 작품 [내 안으로 들어가기](2007)에는 지금의 방식이 예견되어 있다. 윤정희에게 존재가 아닌 되기는, 함입, 겹침, 접힘, 되접힘같은 과정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홀씨주머니 같은 것들이 선으로 이어져 군집을 이루고 매달린 작품 [becoming](2010)에는 요즘 몰두하는 작품과 동질이상의 관계를 가질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 여러 겹으로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듯한 형상들은 원형질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부피가 큰 것은 매달리고 작은 것들은 선반에 죽 배열된다. 그것들은 미술품이 놓여 질 고정된 자리를 벗어나 벽과 천정, 바닥 전체를 총체적인 생태계로 삼아 자리 잡는다. 놓여 진 작품들은 기저 면에서 발생하거나 사라지는 느낌을 주며, 매달린 작품은 거미나 누에가 만들어놓은 섬유질 덩어리처럼 보인다. 도처에 편재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은 또 다른 무엇과 접합하여 변신하기를 욕망한다. 성글성글해 보이지만 묵직하게 중력을 반영하는 형태들은 농축된 작업의 밀도를 가늠하게 한다. 발생 중인 동식물 뿐 아니라, 해체 중인 기관, 구름 같은 모습은 중심에 레이어가 집중되고 바깥으로 갈수록 밀도가 흐려지며 융통성 있는 외곽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온다.
연속되는 하나의 선으로 짜여 지는 윤정희의 작품은 선이 얽히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통일된 구조를 이룬다. 느슨하게 뭉쳐있는 섬유 같지만 하나의 선으로 짜여진, 일련의 순서와 방법이 관철되어 있다. 작품 형태의 원형으로 삼는 유기체는 전형적인 구조이다. 이 구조는 자율적으로 통제되는 체계적 전체를 이루지만, 변형의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이 유기체는 작품이라는 유기체와 중첩된다. 반투명할 만큼 성글게 짜여 지기 시작하지만, 연장되는 운동을 통해 서로 다른 밀도로 성장해 간다. 그리하여 금속성 질료는 생명에 버금가는 질을 획득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반복되는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윤정희의 작품은 항상성의 유지와 변이라는 생명의 기본 과정과 중첩된다. 또한 작품들은 생명처럼 자유를 향해 도약하려 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생명이란 단순한 물리적 존속과는 달리,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라고 정의 한다.
그에 의하면 생명이란 자극에 대한 반응의 독창성을 말한다. 복잡한 구조의 결절점 내지 교차점이 가득한 유기체(작품)은 결코 완결되지 않고 자신을 넘어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그것은 자연처럼 시간과 공간을 연장하는 도식을 전제로 한다. 공간의 연장성은 연장의 공간화이며, 시간의 연장성은 연장의 시간화이다. 시공간의 얽힘 속에 유기체의 표면과 이면은 통합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유기체 철학’을 통해 실재를 역동적인 과정의 기술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현실적 존재는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위상으로부터 위상으로의 성장이 있으며, 통합과 재통합의 과정이 있다. 최종적으로 완결된 느낌이 만족이다. 세계를 실재가 아닌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시간과 공간의 연장성(extensiveness)을 내포한다. 동시적 세계는 연장적 관계의 연속체로 파악된다. 연장적 연속체란 전체와 부분의 관계, 공통부분을 갖는 중복 관계, 접촉 관계,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 관계에서 파생된 존재들의 복합체를 말한다.
이 연장적 연속체는 현실 세계로부터 도출된 사실을 표현하기 때문에 실재적(real)이다. 유기체 철학에서 연장성은 세계 내의 유기체들의 형태적 구조가 순응하는 보편적 형식이다. 연속된 체계가 집적되어서 생기는 형태이면서 동시에 유동적인 구조를 가지는 윤정희의 작품은, 본질과 현상, 실재와 과정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 만든다. 이러한 작품들은 철학사의 대표적인 대조 범주인 발생과 구조를 모순 없이 연결시킨다. 장 삐아제는 구조와 발생이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적이라고 본다. 발생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단순한 전이이지만, 이러한 전이는 항상 약한 구조를 강한 구조로 유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형성적 전이이다. 구조는 선험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형들의 체계이다. 윤정희의 작품에서 반투명한 구조들은 내부의 공동(空洞) 을 보여주며, 공간들 사이의 밀도 차이가 잠재적인 운동감을 변이 가능성을 예시한다.
규모와 밀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적 시작을 찾기는 힘들다. 변형의 사슬은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며 뻗어 나갈 뿐이다. 변화 또한 알고리즘같은 규칙에 따르며, 불연속적인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올이 풀려남으로서 생기는 연쇄 고리의 단절은 와해라는 재앙을 가져온다. 창조적 무질서를 향해 엔트로피를 늘려나가기는 하지만, 불모의 해체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둥글둥글 응집력 있는 형태들은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다. 그것들은 빈틈없는 존재의 그물망을 이루면서도 포용력과 가변성이 있다. 변형은 차이를 통한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나 몸 같이 완전히 코드화 할 수 없는 것들을 소통시키기 위한 새로운 변형 규칙의 고안이다. 이 새로운 변형규칙의 고안에서 주름과 구름은 주요한 모델이 된다. 주름과 구름의 모델을 통해 문명세계를 강압적으로 규정하는 격자는 자유로운 그물망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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